황석영 해제, 이창동 단편소설_「소지」(燒紙 1987)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작품 소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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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祭儀)의 알레고리
-[황석영의 해제 (解題) 한국명단편 101선] 58. 이창동 단편소설「소지」(燒紙 1987).
-소지: 보도연맹 학살사건(保導聯盟虐殺事件)을 작품 소재로
황석영 (소설가)
2014-01-07
이창동은 1954년 경북 대구에서 사남 이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72년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나중에 무엇이 그를 작가로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외로움’ 때문이었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에 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누구에게 보여준 적은 없지만 내가 그 무엇과 통신하는 방법이었다’고 술회한다. 국민학교 때에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이윤복 어린이의 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이창동은 그와 같은 반이었고, 그런 연유로 영화화되었을 때 몇 컷 정도 직접 출연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그가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과 영화에 끈질긴 호기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저러한 인연이 작용했을 듯하다.
내겐 지금은 돌아가신 열 살 차이의 형이 있었다. 형은 대구에서 굉장히 젊은 나이부터 연극을 했다. 나는 열 살부터 형이 하는 연극을 늘 옆에서 보아왔고, 다른 형제들보다 더 관심을 가졌었다. 사실 대구에서 연극이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관객이 적기 때문이다. 돈을 들여 연극을 하고 관객이 없으면 망해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했던 우리 집에 굉장히 큰 부채를 안기는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게 너무 걱정되어 형이 연극을 하면 극장 앞에서 오는 관객들의 수를 일일이 세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무렵 사람이 너무 부족하다는 이유로 형을 도와서 포스터도 붙이고 전단지도 돌렸다. 또 같은 이유로 배우도 하고 연출도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연극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형 한 사람이 연극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계에 큰 부담이었는데 나까지 연극을 하면 집이 거덜난다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재미도 있었고, 연극 자체의 희열도 느꼈다. 그래도 내가 갈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1980년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81년 경북의 영양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2년 서울 신일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겼으며 결혼도 했다. 1983년 중편소설 「전리(戰利)」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이후 1987년까지 「빈집」(『문학사상』), 「소지」(『실천문학』), 「친기(親忌)」(『창작과비평』) 등 십여 편의 단편들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첫 소설집 『소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고 또하나의 소설집 『전리』가 고려원에서 나왔다. 그때에 이창동은 교직을 그만두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단편 「용천뱅이」(『문학사상』) 등 수십 편과 중편 「진흙 속에서」(『빛』),「운명에 관하여」(『문예중앙』), 「녹천에는 똥이 많다」(『문학과사회』), 「하늘등」(『현대문학』)을 썼으며 장편소설 『지상의 사랑』 『새벽의 아이』 『늙은 연인의 노래』 등을 영남일보, 경인일보, 국제신문 등에 연재했다. 그리고 1992년에는「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한국일보 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자신의 팔자를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바꾸게 된다.
그는 등단한 뒤에 ‘예전 관심’대로 동료 작가인 최인석을 통하여 대학로의 연극인들과 교분을 쌓게 되는데 최인석 역시 원래 극작가로 등단했다가 소설가로 넘어온 경우였다. 이때에 배우 명계남, 문성근 등과 교유했고 이들은 나중에 그의 영화감독 데뷔작이었던 <초록물고기>의 프로듀서와 배우로 그를 돕게 된다. 아무튼 이창동은 교사직까지 때려치우고 소설만을 쓰겠다며 전업작가가 되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학청년 시절 이외엔 점점 글쓰는 일이 즐겁지 않았고 삼십대 후반의 나이에 삶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졌다. 그에게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고 무작정 파리로 가서 한두 해 머물 계획도 세웠다. 최인석은 <칠수와 만수> 각색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창동을 데리고 시사회 뒤풀이에 갔다가 감독 박광수를 만나게 된다. 몇 년 뒤에 박감독이 소설가 임철우의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영화화하고 싶다면서 이창동에게 원작자인 임철우를 소개해달라고 전화를 해온 것이다. 그러고는 그에게 시나리오 각색도 부탁했다. 각색을 맡았던 이창동은 조감독까지 맡게 되면서 영화감독의 수습단계로 진입했고 뒤이어 1995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해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그는 명계남, 문성근, 여균동 등과 함께 설립한 ‘이스트필름’에서 <초록물고기>를 내놓으면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이후 이창동의 이력은 모두 ‘영화감독’으로서의 활동에 의한 것이지만 참고로 살펴보면 대단히 다채롭고 성공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데뷔작 <초록물고기>는 그해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을 받았고 영화평론가상 작품상, 대종상 심사위원 특별상,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 등 국내 주요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밴쿠버영화제에서 용호상을 받는 등 세계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1999년 두번째 영화 <박하사탕>으로 그는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고 칸영화제 감독주간 초청, 대종상 최우수상, 감독상, 청룡영화상 각본상, 영화평론가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등을 수상했다. 2002년 세번째 영화 <오아시스>로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젊은 영화인 심사위원단이 수여하는 미래의 영화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있다가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문화부장관이 되었다. 2006년에는 프랑스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2007년의 네번째 영화 <밀양>은 칸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아시아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영화상, 춘사영화상 등의 작품상 및 감독상을 받았다. 2007년 이래 부산, 도쿄, 아시아, 칸, 카를로비바리 등의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2010년 다섯번째 영화 <시>는 대한민국 영화인들이 뽑은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되었고 영화담당 기자들이 뽑은 최고의 영화로도 선정됐다. 같은 해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고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비평가상 등을 받았다. 2011년에는 칸영화제의 비평가주간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영화진흥위원회는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할 만한 작품에 대해 제작비를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지원할 영화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시>가 심사위원 조희문으로부터 영점을 받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조희문의 영점 채점으로 인해 <시>는 영진위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이 작품이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음에도 조희문은 자신의 채점에 대한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창동이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직을 수행했다는 사실 등 정치적인 이유가 고려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르몽드지는 “이 영화가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평가에서 영점을 맞았으나 칸국제영화제에서는 각본상을 받았다”며 영진위를 비꼬았다.’(위키백과, 시(영화) ‘뒷얘기’ 참고)
내가 내 인생을 생각해보니 열심히 소설가로서 글을 쓰게 되면 ‘대충 작가의 이름을 어느 정도 얻고, 그만저만한 소설을 쓰겠다’ 싶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작가의 삶이라는 건 책상 언저리를 돌아다니는 삶이었다. 글이 잘 안 풀리는 편이었으니까. 마치 비유하자면 동물원 우리에 갇힌 맹수 같았다. 우리 안에서 쳇바퀴처럼 돌아다니는 호랑이처럼 말이다. 글이 잘 써지고 내 작품에 만족했으면 모를 일이다. 하지만 작가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고 내 작품에도 절망했었다.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소설에서보다는 장르를 영화로 옮긴 뒤에 말하자면 ‘물을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영화에 대한 그의 재능과 소질이 숨겨져 있었다고 보아야 할지. 그런 점도 물론 있겠지만 영화에서 서사를 다루는 그의 솜씨가 소설가가 되기 위한 오랜 습작기와 전업작가 시기에 다져졌으리라고 본다. 한국영화가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갖추고 내부적 악조건을 뛰어넘어 세계 속에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과정에는 일차적으로 문민정부 이후의 검열 폐지(사실은 검열 완화지만)의 덕을 입은 것이 사실이다. 이야깃감으로 따진다면야 항구 거리의 작부나 농촌의 할머니도 자기 얘기를 쓰면 책 열 권이 나온다는 사회니까 서사가 너무 많아서 문제일 정도다. 그럼에도 수많은 한국영화에서 기획과 의도는 참 좋은데 뭔가 과장을 하거나 충분치 않거나 기승전결이 어설프다는 아쉬운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마치 제대로 교정을 보지 못한 소설을 읽을 때처럼 감흥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수많은 ‘한국영화의 가작’들을 볼 적에, 우리는 영화란 무엇보다도 ‘시나리오’가 일차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작업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나라들보다 ‘장르 넘나들기’가 불문율로 금지되어 있으며 부자유스러운 우리 형편에서는 영화 가요 만화 드라마 등 ‘대중매체에 대한 문학 쪽의 수혈’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흔히는 시나 소설에서 기량에서나 예술적으로 재미를 보지 못한 젊은 작가 시인이 그쪽으로 넘어가거나 아니면 중견의 경우에는 ‘본격문학의 외도’쯤으로 폄하되고, 더구나 실패하면 ‘타락에 대한 매도’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렇게 볼 때에 그의 문학적 수련을 거친 시나리오 각색 작업과 영화 연출로 이어진 ‘작품성’에 대한 국내외의 평가는 온당하다 하겠으며, 한편으로 대중적 흥행에서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점은 그야말로 그의 서사가 지닌 ‘양날의 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창동의 단편소설 「소지」는 1985년에 발표했고 두 해 뒤에 첫 소설집의 표제로 삼았을 정도로 그의 많지 않은 소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평단에서 그의 소설은 대강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분단의 문제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산업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들에 관한 것으로, 이는 현재를 살아가는 개인의 존재방식과 밀접히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의견에 입각해서 살피자면 「소지」는 분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그의 단편들인 「친기」라든가 「용천뱅이」의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 되겠다. 그러나 이문구나 김원일처럼 유년기에 전쟁을 체험한 세대들과는 달리 김성동 이문열에 이르면 양측의 감성적 편향이 있기 마련이다. 전자의 작가들은 십여 세의 유년기에 아버지에 대한 뚜렷한 추억을 지녔고 혼자 남은 가난과 고초 속의 어머니를 내면에서 극복해나가면서 ‘아이어른, 또는 소년가장’이 되어 아버지와 자신을 일체화하고 그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후자에 오면 아버지의 초상은 어머니가 부여한 것들에 의하여 관념적으로 희미하게 형상화되어 감성적인 편향으로 분리된 채로 애증을 과장하게 된다. 이창동의 가족사가 어떠한지 알려진 바는 없으나, 자신이 밝힌 이력에서 보거나 출생연도로 미루어 그가 전쟁 체험의 작가들과는 달리 지방 도시의 평범한 가정환경 속에서 착실하게 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소지」에 나타난 가족관계의 갈등구조는 80년대의 폭압적 현실과 그 원인이었던 이념과 분단을 형상화하려는 소설적 장치일 것이다.
손자가 할머니에게 ‘수상한 사람이 삼촌 잡으러 왔다’고 일러바치는 게 작품의 첫 장면이다. 이들은 십삼 평짜리 조그만 시영아파트에 사는 가족인데 젊어서 혼자된 할머니와 장남 성국, 차남 성호와 손자가 함께 살고, 며느리는 집을 나가버렸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찾아오는 시누이가 올케를 찾아온다. 그들은 이제 함께 늙어가는 할머니가 되어버렸는데 진작부터 치매기인지 신기인지 귀신이 보인다는 시누이는 꿈에 오라버니가 나타났다며 이제는 그의 제사를 지내라고 올케에게 채근한다. 그녀의 남편은 좌익운동을 하다가 매제의 권유로 ‘보도연맹’에 들었고 전쟁이 발발하자 그것이 빌미가 되어 검거된다. 검거되던 날 매제가 앞장서서 다락에 숨었던 그를 불러내어 못 간다고 말리는 시누이의 만류를 뿌리치고 데려갔고 대구형무소에 갇혔다. 형장으로 끌려갈 적에 먼발치에서 죄수들을 싣고 가는 트럭에서 남편 비슷한 사람을 시누이와 아내가 목격했건만 이제 시누이는 그게 틀림없이 오라버니였다고 주장하고 올케는 남편이 아니었을 거라고 버틴다. 따라서 호적에도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뒤늦게 시누이가 오빠를 꿈에 만났다면서 ‘제사를 지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행적 때문에 맏아들 성국은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신원조회가 필요한 사관학교에 지원했다가 떨어지자 대학은 포기하고 말단 공무원이 되어 착실하게 살아왔다. 성국의 퇴근길에 밖에서 기다리던 형사가 집으로 따라와 아우 성호의 ‘동향조사’를 하고 그의 선도에 대하여 형에게 당부하고 간다. 성호는 밤늦게 술도 약간 취해서 무슨 라면 상자를 메고 귀가한다. 상자에 든 것이 책이라더니 형이 성을 내고 열어보라니까 그건 책이 아니라 유인물 뭉치들이다.
“똑똑히 알아둬. 난 너 같은 놈을 제일 미워해. 알았냐? 너같이 말 잘하는 놈. 말로는 뭣이든 다 하겠다는 놈들. 제 부모 형제 제 새끼에게 피해를 주고 못살게 하면서 입으로는 온갖 고상한 소리를 다 하는 놈들. 무엇을 위해 죽겠다는 놈들. 그런 놈들은 무엇을 위해서 남을 죽일 수 있는 놈이야. 니들은 한마디로 빨갱이야.”
“말씀 함부로 하십니다. 형님!”
어머니는 맏아들의 무서운 말에 놀라서 무슨 소리냐고 외치지만, 성국은 우리는 빨갱이의 자식들이라면서 자기가 왜 사관학교에서 떨어졌는지, 왜 승진시험에서 번번이 미역국인지 아느냐고, 그 잘난 아버지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어머니는 문득,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시누이의 권고로 살아 있는 남편을 만나게 해준다는 사내들을 만나러 갔다가 돈도 뜯기고 강간까지 당한 일을 떠올린다. 형제가 싸우다가 아우가 울며 집을 뛰쳐나간 뒤에 어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유인물 상자를 가까스로 끌고 아파트의 공터로 나간다. 그리고 성냥불을 그어 그것들을 태워버린다. 그녀는 종이를 태우고 형해만 남은 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면서 혼백의 명복을 빌거나 소원을 빌던 고향에서의 당제를 떠올린다. 언제까지 자식을 속이고 자기까지 속이며 살겠냐 하던 시누이의 힐난이 새삼 가슴을 친다. 그녀는 종이를 태우다가 입을 크게 벌리고 앓던 이를 드러내며 손자에게 좀 빼달라고 말한다. 흔들리던 충치는 아이의 손으로도 쉽게 뽑혀나온다. 아파서 우느냐고 묻는 손자에게 할미는 연기가 매워서 그런다고 답한다. 불길 속으로 계속 종이뭉치를 집어넣으며 할머니는 손자에게 이른다.
“니도 소원 있으모 빌어라. 지금 소원을 말하모 무신 소원이래도 다 들어주신대이.”
결국 연좌제의 덫에 걸려 좌절한 형과 운동권 대학생인 아우의 갈등을 통해서 아버지의 어정쩡한 행방불명과 아우의 출생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고, 그를 영면(永眠)시키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유인물을 태우는 행위가 좀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아버지를 놓아드리는 제의(祭儀)의 상징성을 띠게 한다는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소지(燒紙)라는 제목을 붙인 것 같다. 평자들은 이를 샤머니즘에 의한 갈등 조정이며 내면적 불화에 대한 화해의 과정이라고 규정한다. 작가가 도처에 마련한 에피소드의 복선들이 차곡차곡 쌓여오다가 마무리 부근의 ‘앓던 이 뽑는’ 장면과 운동권 아들의 유인물을 태우면서 손자와 나누는 대화에 이르면, 이 소설이 그럴 법한 사람살이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작가의 의도적 ‘알레고리’임을 눈치채게 된다.
80년대의 관습들 중에 유산으로 남아 지금도 당당하게 통용되는 것으로 ‘이념 비난’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이념 과잉에 대한 또다른 비판적 반작용의 산물이다. 그렇기는 하여도 언제나 이념이란 ‘한 세계가 자기 세계를 넘어서려는 세계관’의 산물이었다. 인간의 딸꾹질이 기도와 식도를 가르는 막이 닫히는 소리이며 물에서 나와 뭍에 오른 ‘양서류’ 시기의 진화의 잔재라고도 한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지만 어떠한 가버린 이념도 그것은 자기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려던 몸부림의 흔적이며 지금도 모색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출처] [황석영의 한국명단편 101선] 58. 이창동 단편소설_「소지」| 작성자 황석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