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 신작 소설 <세여자>
-운명에 도전한 여성 혁명 삼총사 일대기
2017년 6월28일
[편집부]
"세 여자가 태어난 것이 20세기의 입구였는데 나는 그녀들과 함께 백년 넘게 산 기분이다. 이 소설의 세 여자가 살았던 때는 역사의 가장 음침한 골짜기, 비유나 풍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 '헬조선', 조선이라는 이름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세여자의 인생도 그저 지옥은 아니었다. 여자들은 씩씩했고 운명에 도전했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우리는 지금 연봉이나 승진 문제를 따지다가 우울해 하지만 이 여자들은 현실의 것들을 그닥 개의치 않았고 목숨조차 가벼이 여겼으며 혼자 몸으로 역사를 상대했다.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애드벌룬처럼 떠오르던 20세기 초반에 그들의 인생은 지옥 속에서도 가끔 봄날이었다.
소설을 쓰는 동안 한 시대를 탐사하느라 즐거웠지만 비통한 일들에 많이 울었다. 흔히 작가들이 작품을 쓰고나면 주인공을 이제 내보낸다고 말하지만 나도 이제 세 여자를 떠나보낸다. 세 여자는 내 안에서 무려 12년을 살았다. 그분들의 삶을, 그분들 세대의 삶을, 그 시대의 역사를 위로하며 보내드린다."
- 작가의 말에서.
[저자소개]
조선희
전직 기자이자 소설가. 1978년 강릉여고를 졸업한 후 고려대 독문과에 진학, 대학 졸업 후 1982년 연합통신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1988년 「한겨레」 창간에 참여, 문화부 기자로 일했고 1995년부터 5년간 영화 주간지 「씨네21」 편집장을 맡았다. 「씨네21」이 국내 잡지 시장의 '최고'로 자리잡기까지 5년간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2000년, 오래 묵혀온 '소설쓰기'의 꿈을 위해 직장을 떠났다.
이후 2006년 9월부터 2009년 9월까지 3년 임기의 한국영상자료원장으로 일한 바 있다. '일하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를 펴냈으며, 2002년 장편소설『열정과 불안』(1.2)을 출간하여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고 있다. 저작물로『그녀에 관한 7가지 거짓말』『클래식 중독』, 단편집 『햇빛 찬란한 나날』 등이 있다.
[언론사 서평]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혁명 삼총사’ (경향신문)
ㆍ세 여자 1·2
ㆍ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백승찬 기자
소설은 1991년 12월 한국을 찾은 구소련 무용수 비비안나 박(1928~)이 들고 온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한다. 비비안나 박은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 혁명가 주세죽·박헌영의 딸이었다. 비비안나 박이 공개한 어머니의 유품 속 흑백사진에는 세 여인의 모습이 담겼다. “하얀 통치마 저고리 위로 한낮의 햇볕이 부서진다. 팽팽한 종아리와 통통한 뺨, 가뿐한 단발은 세 여자의 인생도 막 한낮의 태양 아래를 지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가운데의 양장 입은 이가 비비안나 박의 모친인 주세죽(1901~1953)이다. 오른쪽은 그의 단짝인 허정숙(1902~1991)이다. 왼쪽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고명자(1904~1950)다. 장편역사소설 <세 여자>는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한국전쟁 이후를 신여성이자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로 살아낸 세 여성의 삶을 그린다.
세 여자가 사진처럼 밝고 명랑한 삶을 살지 못했으리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식민치하 혁명가의 삶이란 모두 신산했겠지만, 이들 앞에는 하나의 장애물이 더 놓여 있었다. 그들은 여성이었다. 남자들은 축첩해도, 여자들은 청상과부가 자연스러운 때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른 조선 땅에서 봉건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또 다른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봉건제도가 무너질 때 남자보다 여자들이 치르는 전쟁이 더 격렬했다.”
주세죽과 허정숙은 답답한 경성을 떠나 상해에서 만나 곧 친구가 된다. 그곳에서 공산주의라는 천지개벽하는 사상을 흡수한 둘은 경성으로 돌아와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다. 여기에 이화학당 출신의 유복한 집안 외동딸 고명자가 합류한다. 이들은 곧 ‘조선공산당의 여성 트로이카’가 된다.
[책과 삶]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혁명 삼총사’
소설 초반부는 이들이 사회주의 혁명의 희미한, 그러나 강렬한 가능성을 위해 투신하는 젊은 시절 이야기다. 임원근, 송봉우, 최창익 등과 결혼, 이혼, 재혼을 반복한 허정숙은 연애라는 사적 영역에서도 혁명적인 삶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제는 팔짱 끼고 있지 않았다. 세 여성은 체포, 수감, 출옥을 반복하며 활동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 와중에 가족 관계에도 조금씩 균열이 간다. 혁명가에게 가족은 족쇄와 같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연을 맺은 대가가 돌아온다. 주세죽과 박헌영은 외동딸 비비안나를 1932년 모스크바 보육원에 맡긴 뒤 상해로 떠나 공산당 재건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박헌영이 이듬해 체포돼 이송되자 둘은 기나긴 이별을 맞이한다. 주세죽은 1934년 딸을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에 돌아갔다가 남편의 동지 김단야와 재혼한다. 이후 북한에서 부수상 자리에까지 오른 박헌영은 유형생활 중이던 주세죽의 구명 요청을 외면한다. 고명자는 일제에 체포된 뒤 심한 고문을 당하고 잠시 친일 경력도 얹는다.
일본은 패망했지만, 이들의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어제의 동지들은 건국과정에서 사분오열됐고, 나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는다. 김단야가 일본 밀정 혐의로 체포된 뒤, 주세죽은 5년 유형에 처해져 중앙아시아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된다. 주세죽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프라우다를 읽는 인텔리 여성이었으나, 사회주의 모국 소련으로부터도 냉대받은 그에게 남은 것은 한밤의 추위와 외로움을 달래줄 보드카뿐이었다. 병약해진 주세죽은 유형지에서 전남편 박헌영의 숙청 소식을 전해 들었고, 모스크바의 딸 비비안나를 만나러 가던 중 큰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는다. “작은 몸에 거대한 상처였고 짧은 인생에 긴 사연이었다.”
고명자의 죽음은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다. 남북이 교대로 서울을 차지하는 전투를 치르는 와중의 숱한 무명 시체 중 하나로 추정될 뿐이다. 작가는 고명자의 내면을 상상한다. “눈앞이 저승이고 죽음이 지척이며 아이고 어른이고 이유 없이 죄 없이 죽는데 나라고 특별한 게 무엇인가. (…) 하지만 무더운 여름날에 벌써 눈이 텅하고 비어버린 해골을 보면 한때나마 인간의 존엄성이 깃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저 안에 마르크스나 간디나 톨스토이가 들어 있었단 말인가.”
허정숙은 장수했다. 절세의 혁명가답게 늘 꼬장꼬장했으나, 큰 행운과 작은 타협을 거치며 김일성 체제에서 살아남았다. 허정숙은 북한에서 88세까지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냈고, 89세에 사망한 뒤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6231912005&code=960205
[출판사 서평]
혁명이 직업이고 역사가 직장이었던 사람들…
“재산도 버렸고 애인과 가족도 버렸고 더 버릴 것이 없을 때는 목숨을 버렸다.”
_본문 중에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세 명의 여성 혁명가가 있었다.
20세기 초 경성, 상해, 모스크바, 평양을 무대로 그들이 꿈꾸었던 지옥 너머 봄날의 기록!
이 소설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됐다. 1920년대로 추정되는 식민지 조선, 청계천 개울물에서 단발을 한 세 여자가 물놀이를 하는 사진. 1990년 냉전시대의 마침표를 찍으며 한소수교가 이루어진 그 다음 해, 박헌영과 주세죽의 딸이며 소련의 모이세예프 무용학교 교수인 비비안나 박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 그가 들고 온 여러 장의 사진 가운데 하나였다.
작가가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한 것은 사진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허정숙을 발견한 힘이 컸다. 허정숙에 흥미를 가지고 들여다보다가‘신여성이자 독립운동가’라는 새로운 인물 군상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각각의 무게감은 다를지언정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동지이자 파트너였던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이 여성들은 왜 한 번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을까. 이 소설은 우리가 몰랐던 세 명의 여성 혁명가, 그들의 존재를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설은 주인공 세 여자가 살다 간 시대적 배경이 말해주듯 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주변 남자들의 인생과 함께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작가 스스로 세 여자가 주인공이지만 역사가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디아스포라의 시대에 대륙으로 흩뿌려졌던 세 여자의 삶을, 그 세 갈래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히 1920년 상해에서 한국 공산주의운동이 시작돼서 1955년 주체사상의 등장과 1958년 연안파 숙청으로 한국에서 공산주의가 소멸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처럼 역사에도 실수가 있고 착오가 있고 우연이 있고 행운도 있다. 목적과 정반대의 결과가 빚어지고 우연한 실수가 운명을 바꾸기도 함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세 여자를 비롯해 이름 석 자로 나오는 사람은 모두 실존인물이다. 등장인물들에 관한 역사기록을 기본으로 했고 그 사이사이를 상상력으로 메웠다. 작가는 역사기록에 반하는 상상력은 최대한 자제했고‘소설’이‘역사’를 배반하지 않도록 주의했다고 밝힌다.
작가가 작품 속 40년의 시간에서 가장 에너지를 쏟은 부분은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이다. 작가는 지금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그 딜레마가 근본적으로 분단과 전쟁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해방공간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바라본다. 그래서 독자들이 이 소설을 통해 그 시대를 알고 지금을 이해하기를 바라며, 우리 사회의 근원을 들여다보고 마침내 끊임없이 반복되는 해방공간의 딜레마를 넘어서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애도의 궁극이자 여성으로서의 오연한 자부심!(신수정, 문학평론가)
이 소설의 세 여자가 살았던 때는 역사의 가장 음침한 골짜기, 비유나 풍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헬조선’, 조선이라는 이름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세 여자의 인생이 늘 지옥은 아니었다. 여자들은 씩씩했고 운명에 도전했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우리는 지금 연봉이나 승진 문제로 우울해하지만 이 여자들은 현실의 것들을 그닥 개의치 않았고 목숨조차 가벼이 여겼으며 혼자 몸으로 역사를 상대했다.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애드벌룬처럼 떠오르던 20세기 초반에 그들의 인생은 지옥 속에서도 가끔 봄날이었다.
세 여자는 상해에서, 경성에서 20대를 함께 보낸 후 유라시아 대륙의 다른 장소로 흩어졌지만 늘 우리 근대사의 극명한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가령, 주세죽이 스탈린 치하에서 한인 강제이주의 참담한 현장에 던져졌을 때 허정숙은 연안에서 모택동에게 혁명전략을 배우고 있었고, 고명자는 경성에서 친일잡지의 기자 노릇을 했다. 해방공간에 허정숙과 고명자는 38선의 북쪽과 남쪽에 있었고, 허정숙은 김일성의 측근이었고, 고명자는 여운형 옆에 있었다.
이들은 혁명의 여정에서 남편을 잃고, 투옥되고, 고문을 당하고, 아이를 잃고, 마침내 시베리아에서, 평양에서, 경성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식민지 조국의 국민이 되어 일상은 깨지고 생활은 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세 여자는 자연스레 삶을 역사에‘올인’했고, 재산도 버렸고 애인과 가족도 버렸고 더 버릴 것이 없을 때는 목숨을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세 여자를 영웅으로 그리지 않았다. 상황과 역할에 충실했던 그런 여자들이, 20세기 초, 이곳에, 살았었다는 것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평론가 신수정에 따르면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애도의 궁극이자 여성으로서의 오연한 자부심으로 읽히기도 한다.
방대한 지식과 높은 통찰력, 사건이 붓끝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순탄함!(황현산, 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한국의 근세사에는 개항, 일한병탄, 3·1운동, 4·19, 5·18 등 여러 개의 기원이 있다며, 이 소설은 이들 세 여자의 운명이 합쳐지고 엇갈리는 식민지시대 한복판에 근세의 뿌리 깊은 기원 하나가 있음을 알려준다고 평했다. 또한 이 소설은 사건이 붓끝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은 순탄함이 강점인데, 이는 작가가 지닌 전후좌우의 방대한 지식과 높은 통찰력에서 온다고 보았다. 실제 이 소설은 작가가 구상을 시작한 지 12년 만에 출간된 것으로 방대한 자료 위에 긴 시간 숙성 기간을 거쳐 복잡다단한 한국현대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군더더기를 허락하지 않는 작가 특유의 문체 탓에 이야기는 박진감 있고 밀도 있게 전개된다.
작가가 이 소설을 구상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2005년. 그러나 막 집필에 들어가려던 2006년 9월, 작가는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이라는 공직을 맡아 3년을 보냈다. 공직을 끝내고 초고를 쓴 다음 수정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다시 뜻하지 않은 변수가 생겼다. 서울문화재단 대표로 일하면서 4년이라는 시간이 또 흘러갔다. 지난 해 소설가로 돌아와 원주 토지문화관에 두 달 머물면서 작품을 갈무리해 이번에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작가는 여러 가지 이유로 진행이 늘어지는 동안 세 여자의 인생이 머리와 가슴 속에서 사과처럼 천천히 익어갈 수 있어서 오히려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이들에 대한 복권도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지만 그 가운데 특히 여성들에 대한 대중적인 조명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격랑의 근현대사 속에서 치열하게 살다 간 많은 여성들의 삶이 오롯하게 우리 곁으로 되돌아오길 기대한다.
[예스24 제공]